팀의 결성과 창단공연
정종임 : ‘타루’는 2001년도 12월에 만들어졌어요. 만들 때는 이자람 씨가 1대 대표였습니다. 판소리하는 사람들끼리 경쟁만 있다 보니 소통을 해보자해서 만들었어요. 마당패 연출, 마당패 기획, 판소리 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첫 공연은 홍익대학교 안에 있는, 학생 광장이라고 하나요, 거기서 첫 공연을 했었습니다.
김나리 : ‘소울지기’는 정가의 무대도 창작을 시도하시는 분들도 많지가 않아서, 그러니까 창작곡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정가를 어떻게든 좀 알려질 수 있는 공간에서 무대라든지 음악을 좀 만들고 싶어서 모였어요. 구성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는데, 2008년에 신랑 때문에 두바이를 간 적이 있었어요. 애기를 데리고 다녀왔는데 와서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자들하고 돈을 조금씩 모았어요. 그게 4년이 됐고, 4년 동안 모았지만 일단 그걸로 저희가 곡을 만들기는 힘들 것 같더라고요. 소리꾼들은 자신의 얘기도 많이 하는데 저희는중고등학교 때부터 그냥 악보를 보고, 고것만 읊었을 뿐이어서 그런 분야의 능력이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시조시를 만들어서 우리가 노래를 했어야 되는데, 워낙 그런 과정들이 없었고. 그래서 일단 그 돈으로 공연을 하면 다 없어질 것 같아서 일단 음반작업을 하기로 하고 곡들도 받았어요. 그 때 음반 준비 했던 곡들로 2013년 초에 풍류극장에서 <청청공연>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민소윤 : ‘아나야’는 팀이야 2006년에 결성이 되었는데, 배경은 ‘민요연구회’라는 옛 운동권에서 만든 단체입니다. (일동 웃음) 그래서 토속민요로 계속 고민했던 분들이 계시는데, 그 ‘민요연구회’에서 2005년 12월 국악원에서 프로젝트 공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팀별로 곡들을 계속 발표했는데, 그 때 참여 멤버 몇몇이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나봐요.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지, ‘민요연구회’소속이었던 유인열 선생님이 토속민요로 공연팀을 만들자고, 팀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YMCA에서 청년기업(현 사회적기업)을 따보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최저임금 지급, 작곡 가능자라는 조건으로 주변에서 지인들을 몇 명 모았는데, 제가 전에 다른 퓨전국악 팀을 하다가 쉬고 있ᄋᅠᆻ어요. 근데 저희 드러머가 '소윤아 너 집에 있으면 스트레스 쌓이니까 나와서 이런 팀 돈도 준대. 나와서 해볼래?'해서 '그래, 그럼.' 이렇게 된거죠. 그래서 민요에 관심 있던 선생님을 바탕으로, 토속민요로 음반을 1년 내에 내는 걸 목표로 여섯 명이 모이게 된 거에요. 저야 국악을 전공했으니까 상관없는데, 래퍼나 키보드는 국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모여서 월급 준다니까 하게 된 거죠. 일종의 회사? 출퇴근 관리는 하지 않지만. 근데 이제 딴 팀들끼리 모여놨더니 원하는대로 되나요? 안되죠(웃음). 지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그래서 약간 방향성이 틀어지면서 민요는 랩이다 대중음악을 지향하자,라는 식으로 틀어졌어요. 그래서 첫 공연은 ‘다산 정약용 기념관’이 건립이 되면서 의뢰 차 공연이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다산 정약용 시 여섯 장을 프린트 해오셨어요. 그 선생님이 ‘자, 곡을 써’ 그래서 각자 보고, 이제 자기가 쓰고 싶은 시들을 여섯 개 정해서 곡을 만든 후 ‘다산 정약용 기념관’에서 첫 공연을 했었어요. 지금 이제 색깔도 바뀌고 팀원도 바뀌고 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졌죠.
정진세 : 얘기 들어보니까 출발점에 어떤 규약이라고 볼 수 있는 목돈이라든지 아니면 네트워크가 있으셨던 거네요,어떤 팀은 목돈이라는 규약이 없는 대신에 인적 구성이 있었고요.
창작방식에 대하여
정진세 :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볼까요. 아마 기간이 꽤 되신 분들은 초창기와 창작방식이 달라지긴 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질문을 최근에는 어떤 식으로 영감을 받아서 작업을 하시는지로 수정해서, 간략하게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종임 : 저희는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서로 좋은 것들을 찾아가는 공동창작은 현재까지도 쓰고 있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최근에는 어떤 작품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니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게 되는데, 가장 말할 만한 방법은 작창일 것 같아요. ‘타루’의 소리꾼들의 베이스는 판소리에 있다 보니까, 대본을 받았을 때 춘향가 어떤 대목하고 느낌이 되게 비슷하다며 같은 장단으로 해볼까, 아니다 드라마 상으로 좀 더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작창을 하죠. 그래서 사실 이런 말도 많이 들어요. 너네 그냥 노래 가사 바꾸기, ‘노가바’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전통 판소리도 ‘노가바’예요. 조금 아쉬운 건, 사실 어떻게 노래하는 가에 따라 느낌이 엄청 다른데 저희가 들을 때는 다 똑같이 들린다는 거에요. 이게 5도 화성, 3도 화성 이렇게 정리된 체계가 있는 게 아니니까, 잘 표현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하더라도 공연할 때 어려움이 생기는 거죠. 게다가 처음엔 다들 작창을 하는 걸 힘들어했어요. 배운 적도 없고, 문화재를 망치는 것은 아닌가 싶고. 근데 이제 작창을 계속 하다 보니까 본인들이 어떤 장단이 어디에 어울리는지, 어떤 선율이 어떤 느낌에 맞는지 등등 노하우가 생겨나게 되더라고요. 서로가 서로의 노하우가 되어주기도 하고.
김나리 : 저희는 정가라는 장르를 뭔가 바꾸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들을 땐 별반 다르지 않단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초반에는 아예 대중화 하나만 보고서 작곡가들을 찾아갔어요. 다른 사람들이 잘 들으려면 익숙한 거를 해야 되니까 익숙한 피아노가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했죠. 그런데 저희를 모두가 좋아할 순 없잖아요. 왜 양반들이 지켜야 했던 것들을 다 깨고, 발라드 가수들이 하면 더 잘할 노래들을 하고 있냐는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어쨌든 저희는 노래를 많은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많은 사람들의 귀를 자극한다고 할까요? 그러고 싶어서 가장 대중성 있는 것들과 만나서 했고요. 시조시는 정말 45자 내외의 초-중-종장이라는 짧은 형식에 정말 많은 내용을 압축해 넣어야 하는 거에요. 그래서 한 단어지만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것도 있고. 그래서 최근에는 전통가곡에 있는 선율을 토대로 한 대중성 있는 선율 위에 현대어로 풀어 놓은 시조시를 얹어서 좀 더 두 가지를 동시에 전달해보려는 시도를 했어요.
정진세 : 시작하셨을 때와 지금하고 정가에 대해 대중들의 이해도가 달라진게 있을까요? 확실히 판소리만 해도 2001년과 지금은 좀 달라졌잖아요. 아, 대중들의 인식이 아닌가요? (일동 웃음) 어쨌든 예술계 안에서의 인식은 좀 달라졌잖아요.
민소윤 : 2001년도에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막 이런 식이었는데.
정진세 : 이제는 판소리하면 모르는 사람은 없는 거잖아요, 정가는 여전히 어떻게 보면….
김나리 : 그러니까요. 예전에는 전통공연 보러오라고 하면 다 너무 어렵다면서 가는 거에요. 저희가 왜 어려울까 했는데, 가사 탓이 크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정종임 : 그렇죠. 가사 이해가….
김나리 : 그래서 가사를 풀어 써 봤는데, 따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좀 제가 하는 말이 어려울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따라 부를 수 있는 꼭지들을 노래에 넣어가지고 만들었더니,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라는 등 반응은 더 좋더라고요.
민소윤 : 사람들이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가 있고, 아니면 감상할 수 있는 노래가 있다면 ‘아나야’는 전자인 것 같아요. 흥얼거리는 노래란 것 자체가 토속민요였고, 민요는 민중들이 불렀던 거고요. 그게 강압적인 청취에 의한 것이든 어쨌든, 지금의 대중가요는 대중들이 부르는 거잖아요. 저희는 아카데믹하게 작곡을 전공한 사람이 없어서 처음 곡을 쓸 때 많이 애먹었는데요, 결국에는 저희 음악이 이 시대의 민요가 되고 후대엔 이 시대의 민요였다는 평가를 받길 바라요. 되게 적극적인 양악 팀원들은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소스를 받아서 하루 종일 듣는데, 사실 다 똑같았죠. 처음엔 그 중에서 괜찮은 것들을 샘플링해서 쓴 곡들이 많았어요. 양악 쪽에서 작곡할 땐 실제로 국악 라인을 쓰기가 어려우니까, 일단 소스로 쓰고 변형하는 식이었죠. 그리고 제가 할 땐 작창으로 갔는데, 코드 만드는 거나 편곡에서 많이 약했죠. 그래서 음악이 나오고 난 뒤에 들어보니 각각의 색깔이 다 느껴졌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에는 색깔이 다 달라서 편곡하는 과정이 어려웠어요. 예를 들어 제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스펙트럼이 0부터 10이면 누구는 5~15 에요. 0으로 갈수록 국악적, 15로 갈수록 일렉트로닉적인거죠. 그래서 작곡자 뿐 아니라 팀원이 편곡에 참여했는데, 모두가 교집합으로 갖고 있는 정도가 기껏해야 4-5-7 정도? 이 안에서 어떨 때는 너무 양악스러울 때가 있고 때로는 반대일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도 곡을 내면 초반에 잘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이건 어떻게 써도 곡이 안 된다면서요.
정진세 : ‘아나야’만이 감당하거나 감수하는 음악이 있는거네요.
민소윤 : 네. 이걸 양악-국악 상에서 얘기하진 못해도, 우리 안에서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 거죠. 근데 창작자 입장에서, 예를 들어 너무 진한 진도씻김굿을 쓰고 싶다든지, 뭔가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결국 각자 음반을 내기도 해요. 팀원 중에서 이번에 한 팀원은 펑키 음반을 냈어요. 팀에서 소화할 수 있는 스펙트럼엔 한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팀이 공통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영역에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자는 포인트가 있어요. 물론 거기에서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경중하가 나뉘긴 하는데, 그 좋아함 속에서 서로 창작을 하려고 하는 영감은 주로 돈이 들어올 때 (일동 웃음) 생기죠.
권보라 : 항상 듣는 질문이시겠지만 보컬이 세 명인 건 어떤 의도이신가요?
민소윤 : 그건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창단멤버 때문에 랩과 판소리 보컬로 가려고 했어요. 구성요건은 이 둘로도 충분했는데, 그 분이 국악에서 아무리 날뛰어봤자 먹고 살기 힘드니 대중 판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글 했어요. 그래서 가요 보컬을 뽑았죠. 그래서 이제 세 명이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판소리 하는 친구가 나가고…. 그래서 기존에 세 명의 보컬이 있는데, 저희는 랩/민요가 있어서 ‘아나야’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팀원들이 서운해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음악적 방향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저희가 창단 때는 드럼하고 일렉을 했거든요. 근데 대금이 둘을 이기려면 맨날 높은 소리만 내야 하는 거에요. 그리고 기동성을 극복하려고 드러머가 젬베랑 퍼커션 쪽을 연습하기도 했죠. 그렇게 ‘아나야’가 좋으면 본인이 전환을 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어찌 보면 맞는 거에요. 지원사업은 사실은 지원사업이 아니고, 우리는 이시대의 민요를 지향한다는 건데요. 그냥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되는데 이 친구들이 소외당해서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제일 많이 바뀌는 게 가요보컬이에요.
팀의 네트워크, 응원과 지지가 되는 사람들, 관계성, 지속의 이유들
정진세 :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객분들, 혹은 관객으로 인해 발생한 운 좋은 일들이 있으셨나요? 제가 특이하게 생각했던 게, 굉장히 예상치 못했던 네트워크들이 있으시더라고요. 전혀 알거 같지 않은데 연예인을 안다던지, 가수를 안다던지…. (일동웃음) 이처럼 어떤 그런 지지그룹이나, 우리 팀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있나요?
김나리 : 지지그룹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희는 노래 자체가 대중이 아니라 풍류방에서 연주하는 사람들끼리 즐겼던 음악인데, 그런 사정들을 알고 시작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죠. 그냥 내가 노래를 하고 싶은데 판소리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애들이 많고…. 또 정가를 하면 관객들 호응은 없고 무대에서 끼를 내뿜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소울지기’ 노래는 정가에서 사용하는 창법들을 사용하면서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든 거 같아요. 작은 공간이 아니라 무대에서 관객을 위해 노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같아서 정가하는 친구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정진세 : 정가의 특성상 한번 봤을 때 되게 매료되는 관객들이 있지 않나요? 가곡도 서양가곡으로 알았다가 한번 보고나서 푹 빠지는 관객들도 있을 것 같은데.
김나리 : 제 주변엔 별로 없구요. (웃음) 너무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 이런 말을 하는 관객들은 많으세요.
정진세 : ‘더 알고 싶다’의 다른 표현인 것은 아닐까요.
민소윤 : 되게 긍정적으로 보세요. (일동 웃음)
정진세 : 저는 저도 정가를 전혀 몰랐다가 한번 들었을 때 푹 빠졌었거든요. 판소리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이번엔 ‘아나야’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팀을 지속할 수 있었나요?
민소윤 : 첫 번째는 아까워서, 두 번째는 시간 투자, 세 번째는 팀워크. 팀은 결국 팀워크 때문에 오래 유지되는 것 같아요. 리더가 자본이 있지 않는 이상 돈이 없는 건 똑같고, 이제 그만둘까 하고 생각할 즈음에 하나씩 사건이 터져요. 수상을 한다든지, 지원상 큰 게 터진다던지…. 한 발을 내딛게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생겨요. 그런 사건들이 생기면 의무감 때문에서라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팀워크도 좋아지고. 돈도 좋지만 좋은 음악이 나왔을 때 팀워크가 가장 좋아지더라고요. 그런 게 생명줄을 조금씩 연장시키는 원동력이고 지지세력은 딱히 없습니다. 각자 모든 집안에서 다 반대를 해서요. (일동 웃음) 결국 관객이 지지 세력인데, 콘서트는 결국 아는 사람들이 오는 거잖아요. 대부분은 행사 오브리를 통해서 관객이 생기더라고요. 지나가던 한강변에서 공연을 하는데, 부엉이님이란 분이 2007년에 우리 공연을 보고 힐링이 되었다고 영상을 다 찍어서 유투브에 올리셨어요. 물론 지금 너무 예전 영상이어서 부엉이님 그거 좀 지워주시면 안 되냐고…. (웃음) 작년에 대학로 <팝업씨어터> 공연했을 때에도 길거리에서 만났던 분이 계속 페이스북으로 공연 보고 싶다고 하셨던 적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공연에선 오히려 사람을 못 얻고, 그냥 10분 짜리든 무엇이든 열과 성의를 다 해서 공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정종임 : ‘타루’는 일단 너무 다 젊었어요. 처음엔 좋아서 막 모였고, 다양한 분야를 연계를 하면서 운이 좋게 지원금을 잘 받아왔고,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기획팀이 쭉 끊이지도 않았어요. 소위 말해 팀장급 리더 선생님들이 계속 연결되었거든요. 그래서 투자를 하진 못해도 지원금을 받았고, 만든 작품들을 좋아해주셨고요, 또 그 작품으로 인해 새로운 친구들이 들어오고…. 저희가 한 번 지원금을 안 받고 싶다고 꿈틀댔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객들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있는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어떤 세력이라기 보단… 열렬하게 저희를 응원하는 관객들은 없지만 예술계에서 계속 해보라는 응원들은 좀 해주시는 것 같아요. 저희는 월급을 받아가면서 하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지원금을 통해 이뤘죠. 예비 사회적기업을 3년 동안 하면서… 처음에는 너무 신났죠. 근데 이제는 30%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것도 너무 힘들고, 3년 정도 하다 보니까 마인드도 조금 바뀌고. 근데 그 위기에서 또 다른 희망을 봤던 것 같기도 해요. 위기를 통해서 보리와 이삭을 구분지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운이 좋게도 ‘타루’는 지원금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작품을 만들 수 있었어요. 근데 그 가운데 제일 좋았던 경험은 스태프 선생님들이었던 거 같아요. 이제 인맥이 생기면서 그런 바운더리가 생긴 게 좀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팀의 변화, 위기, 사건 그리고 이어짐
정진세 : 마지막 질문으로 정리를 하고 싶은데요. 지난 기간 동안 팀에서 가장 큰 사건, 혹은큰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보면 생애 주기가 바뀌는 시점이 돼버렸잖아요. 10년이 넘어가면 결혼도 하게 되고, 뭐도 하게 되고… 일신상에 변화도 많이 생기는데 어떻게 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정종임 : 지원사업이 잘 안 된 것도 있는데, ‘타루’는 큰 사업을 아예 안 하기로 마음먹기도 했어요. 올해 상주단체라는 사업이 7년 정도 있었는데, 계속 신작을 내다 보니까 너무 힘들고 지치기도 했고요. 그래서 팀장님이 이제 상주단체 사업 말고 하고 싶은 거 하자고 결정이 됐어요. 각자 정말 하고 싶은 작품 하면서 내공 쌓고, 쉬고 싶은 사람은 쉬고…. 그 다음은 이제 프로젝트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작품이 안 맞으면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요렇게 나아가고 있구요…. 그래서 올해 작품 만들 때 시간이 좀 부족했어요. 사실 어느 작품이나 그렇겠지만, 내년에 신작을 해 보자고 좀 길게 제작기간을 가져보려고 했는데. 여전히 그게 잘 안 되지만 제대로 기간을 두고 초기 프리 프로덕션을 만들어보자고 하고 있고요. 그리고 창작자 내부에서 동요되지 않으면 만들지 않겠다는 것도 좀 썼어요. 예전에는 소리꾼들은 반응이 별로 안 좋아도 기획팀에서는 너무 좋다고했으면 만들었어요. 끌고 나가고. 근데 올해는 이제 모두가 좋아하는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보는 것, 그리고 그 전 과정을 진짜 겪어보게 한다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대중한테 들려주는 걸 고려했더라면요.
정진세 : 큰 변화이자, 어떻게 보면 초심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종임 : 네, 초심. 지금 아무튼 큰 변화의 시기가 2016년 인거 같습니다.
김나리 : 저희는 팀 내에서 가장 큰 사건은 수상이었죠. 그 전까지는 뭔가 주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안 좋은 소리들만 귀에 꽂히더라고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건 다른건가 고민을 하면서 ‘21세기’를 나갔죠. 나갔더니 수업을 했던 학생이 인사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친구가 심사하러 오신 줄 알았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서 너무 민망하고 창피해서, 이번에 한번만 나오고 못나오겠다. (웃음) 한번 만 한번만 나가야겠다 싶었는데 큰 상을 타서 되게 마음의 위안이 됐던거 같아요. 어느 한 구석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구나 싶어서 용기를 얻게 되었어요.항상 너무 어려운 점이긴 한데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원사업도 엄청 많이 썼는데 힘들고, 같이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사람도 없었고. 그런 걸 4년, 5년을 하다 보니 결국에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약간 심각해지려고 해요. 어차피 정가가 발랄한 음악도 아니었고, 고민들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는 곡들이죠. 그래서 그 시대에 그들이 느꼈던 질문들을 나도 고민해서 만들어볼까 싶고, 올해부터는 그렇게 좀 해볼까 생각합니다. (일동 웃음)
정진세 : ‘소울지기’의 음악적 변화를 이제 예감해 볼 수 있겠네요
김나리 : 네. (일동웃음)
민소윤 : 저희 팀은 2009년 말에 리더랑 찢어졌어요. 그게 1차 적으로 큰 사건이었는데, 그 때 리더가 음악성을 많이 주관했었기 때문에 팀원하고 그런 말을 했어요. 이제 음악적으로 한 보 뒤로 갈 거라고, 그런데도 헤어질 거냐고. 어쨌든 그게 첫 번째 사건이었고요, 이제 시즌2로 새로운 멤버들을 만나서 새로운 일을 했죠. 이제는 정 대표님과는 반대로, ‘아나야’는 애초에 대중음악을 지향해서 3~4분 짜리 곡들을 항상 냈거든요. 그 과정에서 스토리텔링적으로 엮을 수 없는 곡들이 생겨요. 나중에 한 시간 짜리 프로그램을 짜면 어거지스러운 부분이 있는 거고요. 그래서 이제 대본부터 시작하는, 가사가 중심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10년이 되면 10년의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지원사업을 받아왔는데, 그거에 대해 제대로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공공성을 가진 작품을 만들자는 것도 목표였고요. 쇼케이스를 하고 사전펀딩을 받을 생각이에요. 옛날에는 만들어놓고 좋으니 지원해달라는, 사후지원 개념으로 많이 했어요. 그래서 돈이 되든 안 되든 의미 있는 진짜 예술 작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곡들을 만들고 싶고, 이걸 일곱 명의 팀원들을 설득시키는 작업이 되고 있어요.
정진세 : 창작 마인드의 변화가 있으신건가요?
민소윤 : 아니요, 자기 꼴리는 대로 녹음하고 있는데. (일동웃음)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는데, 나중에 곡을 초이스 할 때 관객이 좋아할만한 것, 혹은 상황에 어울리는 곳을 정하던지 하는데. 그때 자기 곡이 자꾸 초이스가 안 되면 암묵적으로 잘 초이스가 되는 곡을 쓰려고 해요. 자기도 딜레마인거죠,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데. 저작권료는 기껏해야 몇 천 원인데, 초이스 되면 기분이 좋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곡들을 다 버리고 어떤 것과 콜라보 된 작품을 만드려고 해요.
정진세 : 얘기해주고 계신 고민 자체가 사실 전통예술계에서 보기 드문 고민인거 같기는 해요. 사실 많이 받았다고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지만, 지원금을 많이 받았다는 것에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계신 것 같아요. 그만큼 전통예술계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리더 그룹이 됐다는 생각?
권보라 : 약간 오래된 팀들은 다 이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더 광대’ 도 그렇고 약간의 선두 느낌이 있었던 팀들은 자리를 잡을수록 모범이 돼야 된다는 자기 암묵적인 책임감이 있는 것 같아요.
민소윤 : ‘소울지기’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이 나이에 여기 이 친구들하고 경쟁하고 있는 게 좀 쑥스럽죠. 이제 오디션 같은 데 ‘아나야’가 왜 왔냐는 시선을 받을 때가 있는데, 사실 빌어먹는 건 똑같은 거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레퍼런스가 되지 못한 게 서운하죠. 저는 이 친구들이 더 잘 나갔으면, 10년 뒤에 이 음악들이 레퍼런스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운영 형태든 음악 형태든 좋으니까 모든 후발 주자들의 레퍼런스가 되었으면 하고, 방금 권보라 선생님 말씀처럼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있어야 하고요.
세컨드잡에 대하여
임혜경 : 오브리에 대한 질문은 다들 머릿속으로는 이런 저런 말풍선을 가졌을 거 같은데요. 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종임 : 작년에 예비 사회적기업이 끝난 뒤, 2년 정도 사비를 털어 월급을 주고 이제 못 준다고 선언을 했어요. 이걸 유지하다 보니 지금은 오브리에 대해 적극적이에요. 예를 들어서 국악원에서 천만 원 받고 ‘타루’에선 백만 원만 받아, 이런 식으로요. 문제는 작품이 겹쳤을 때. 그럴 때는 기획 팀에서 좀 힘들죠. 만들어 놔야 하니까요, 지원금 부담을 느끼시지 않으실 테지만.
민소윤 : 느끼라고 얘기하는 거야. (일동 웃음)
정종임 : 세컨드잡은 최소한으로 해야 할까요? 살아 남으려고 해야 할까요? 저희 막내 친구가 여자 아이인데 결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아무 고민 없이 올해 좀 쉬면서 작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저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그러면서 분명히 배우는 건 있지만 이러다 가버리는 건 아닐지 같은 불안한 마음은 있죠. 근데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적극적으로 해서 ‘타루’도 좀 알리고 오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소윤 : 팀으로 오브리를 나왔을 때 제일 좋은 건 영광굴비축제 가면 굴비를 받아오고, 농협행사가면 쌀을 받아오고…. (일동 웃음) 아까도 얘기했듯이 오브리 공연에서 관객과 직접 만나잖아요. 이런 공연을 끝나고 나면 관객 반응이 되게 따뜻하니까 에너지가 더 많이 와요. 물론 자체적으로 기획하시는 분들 중 하대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일회용 만남이더라도 스탭 간의 관계는 금방 변하거든요. 실력으로 보여주고, 같이 존중해주면 아무리 지방에서 행사를 잡는 분들이라도 스탭이 팬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올해 ‘창작산실’ 떨어지고 다 떨어지니 어떤 기획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돈 쓰는 건 다 떨어지고 돈 버는 거만 되었ㄷ고. 여하튼 오브리는 돈을 버는 거니 행복한 일이죠, 전체적으로. 근데 개개인적으로 팀원들이 나가는 건 좋게 생각하면 에너지를 한도 끝도 없이 배워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베이스가 국립관현악단에 거기 베이스 주자로 나가요. ’가야금이 그렇게 생겼더라. 내가 다음에 가야금으로 곡 쓸게‘ 하는 것처럼 스케치 해오는거죠. 이렇게 양악하시는 분들은 국악쪽 가서 배워 오시는 것들도 있고 하니까 사람을 컨트롤 할 순 없는거같아요. 그냥 오브리에서 좋게 돈도 벌고, 공부 많이 해오라고. 자꾸 이렇게 잘한다고 해줘야지 그걸 컨트롤 하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정진세 : 피할수 없다면 더 즐기고 더 많이 경험하고 배우자는 생각이군요.
민소윤 : 네네. 그리고 예술적 영감들도 밖에 있을 때 받기도 해요. 다른 걸 보고 다른 걸 해야 해요.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아무리 팀끼리만 있다고 해서 절대 예술적으로 올라가진 않는 것 같아요.
김나리 : 적극 권장하지 않습니다. (일동 웃음) 못 먹여 살리니까 나가서 먹어라, 이거죠. 그런 게 있어야지 저희도 돈이 쌓이고 저희 공연을 할 수 있는데. 근데 저희는 실질적으로 그렇게 의뢰가 많이 안 들어와요. 뭐 어딜 가서 대중성 있는 음악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딱 무대에 섰을 때 객석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그렇습니다.
민소윤 : 그러니까 의상을 바꿔야 돼. (일동 웃음)
정진세 : 오늘 긴 시간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