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결성과 창단공연에 대하여
김형군 : 첫 공연이 아마 2010년 1월 상상마루 얼굴마켓 공연이었던 거 같아요. 그 당시 원래 일우 씨가 ‘포티나인몰핀스’ 밴드를 또 하고 있었을 때죠. 상상마루 공연은 원래 저희 회사에 있던 라인업에다가 결이 좀 다른 팀들도 올라가는 공연이었고요, 어쿠스틱한 무대가 필요한 상황이어서 ‘몰핀스’의 곡들에 국악기를 가미해서 만들어 볼 방법이 없을까, 하고 일우 씨와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일우 씨가 다른 친구들과 하고 있는 팀이 있는데 그 팀은 어때요?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히 괜찮다고 그랬고, 그렇게 해서 ‘잠비나이’ 를 처음 만났어요. 그 당시에 마켓에 한 백 오십 명 정도가 있었고요. 가운데 무대를 놓고 공연을 하는데 그 자리가 굉장히 소란스럽거든요.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런데 공연을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집중을 하더라고요. 곡들은 지금보다 좀 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었고, 좀 더 앰비언트한 느낌이었는데, 사람들이 소리도 안내고 보고 있더라고요. 어, 이거 봐라? 약간 신기한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같이 작업을 진행해볼까? 하면서, EP준비를 하면서 계속 공연을 하게 된 거죠.
권보라 : 그때 세 분(이일우, 김은용, 김보미)이 공연하신 거예요?
김형군 : 네네, 그때도. 멤버는 계속 동일해요. 제가 음악적인 터치는 하지 않아요. 왜냐면 저는 뮤지션이 아니기 때문에. 일우라는 친구자체가 음악을 잘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믿고 가는 거죠 사실은. 거기서 누군가가 간섭을 한다면 오히려 팀이 망가지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서요.
장재효 : ‘소나기프로젝트’는 애초 프로젝트 자체를 94년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때는 좀 막연했죠. 2006년에 어떤 계기로 해외 페스티벌 투어를 목적으로 단체를 하나 만들려고 그랬는데 그냥 단순히 국악만 하는 단체가 아니고 미술이라든가 무용이라든가 이런 타장르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뭔가를 해보려는 목적으로 만든 거예요. 이런 저런 행사는 했지만 2008년에 공식적인 첫 레파토리 작품이라고 만들어 냈던 게 장광산물 <바람의 숲>입니다. 지금은 힐링 퍼커션이라고 하고 있는데요, <바람의 숲> 이라는 작품은 90분짜리 장구하고 목소리만 가지고 하는 공연이에요. 그것 때문에 타악 팀으로 알려졌지만... 다양한 프로젝트를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자유롭게 하되, 어떤 울타리는 있어야 되잖아요.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그런 모호한 성격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가게 됐죠. 그래서 어느덧 창단 된지 10년이 됐습니다.
권보라 : <슬기둥>이 벌써 31년 되셨는데 창단 당시 어떤 목적으로 생겨났는지, 당시 국악계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준호 : 70년대, 80년대 이때 초반에는 한국음악이 앞으로의 비전이라는 것을 봤을 때는 정말 깜깜했을 시기였어요. 그래도 우리가 뜻한 바가 있어서, 한국음악을 이대로 방치하기 보다는 단점이 뭐고, 한국음악을 일반대중이 왜 싫어하고 하는 거에 대해서 점검을 해보자. 점검하는 과정에서 너무 우리가 전통 위주로 하다보니까 시대는 빨리 흘러가는데 그에 맞는 음악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거예요. 물론, 일반 대중들이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한국음악교육을 제대로 받고 생활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죠. 그래서 그거를 만들고자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 80년대 초부터 만나가지고 작은 음악회, 행사, 음반관계 이런 것을 하다 보니까 하게 됐어요. 그때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이 85년도에 같이 KBS에 창단하면서 들어오게 됐어요. 그 때 이렇게 할 바에는 우리가 악단을 하나 실내악단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낫겠다.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그해서 하게 됐죠. 가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턴데 그 전에 김영동 선생이 한 일이라든가, 조악보 연극음악에서 썼던 것들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인데요, 그 또한 국악 전공자들이나 알고 있었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첫 회에 창단기념 차원에서 김영동 선생이랑 같이 합작음반을 냈어요. 그래서 그게 ‘국악가요’라는 이름을 처음 붙여서 활동하는 시기가 됩니다.
권보라 : 그러면 그 당시는 국악계에 창작음악을 하는 국악팀들이 없었다고 보면 되나요?
이준호 : 없었죠. 80년대 창단할 때만 해도 국악그룹이 늘 조심스럽게 만나서 했었는데, 그렇게 이름을 걸고서 했던 부분은 아마 처음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 - 지난 10년간의 변화와 위기
장재효 : 저 같은 경우는 전통적인 것에서 착안을 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바보 같지만 학교에서 강의를 한다거나 혹은 레슨 같은 다른 것을 안 하고 오직 작품으로만 활동을 해서 생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해온 케이스에요. 풀타임 아티스트를 지향한 거죠. 풀타임 아티스트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말장난일 수도 있는데 풀타임 아티스트가 자기가 히트곡이 있어서 충분히 그 수입으로 혹은 공연 수입으로 생활을 하고 심지어는 굉장히 남부럽게 살 수 있는 환경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지만, 저는 어떤 무형문화재 선생님 밑에서 몇 십 년동안 갈고 닦으면서 그 길을 가겠다. 목표를 설정했던 게 아니고, 자유롭게 제 목소리를 내고자 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저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그런 목표 설정을 했던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좋은 선례를 남겨주고 싶었던 그런 젊은 시절의 꿈이고요. 아직까지는 별로 그렇게 못한 성공을 못 한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팀으로 보자면, 중간에 이걸 계속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이 있었죠. 그래서 2010년인가 즈음에 1년은 안 해! 전략적으로 그리고 일을 스톱을 해본 적이 있었어요. 결국은 생활고죠. 생활고라는 부분, 생활고라는 말을 굳이 쓰는 이유는 이걸 가지고 작품이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안 팔려요. 할 수 있는 다닐 수 있는 공연장소랄까 이런 것도 너무 작고 그래서 첫 시작부터 외국을 했던 건데 2008년에 인제 자금지원을 받기 시작을 했는데 뭐 많이 받은 건 아니지만 외국에 2009년까지 나오고 나니까 답이 없더라고요. 이거를 이딴 식으로 계속 유지를 한다는 거는 일단 창작자로서 너무 회계에 쏟아 붓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이건 안 좋다. 그리고 지원을 하려면 회사도 해야 되고 뭘 만들어야 되고 이런 조건이 그냥 재밌게 창작을 하는 시간을 잡아먹더라고요. 그래서 아유 안 해! (웃음) 그리고 지원도 안하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건 이렇게 다 덜어내고 그냥 재밌게 말씀을 드리는 건데. 그래서 안했는데, 하지만 다시 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래도 하면서 다시 재밌는 거 하자, 이런 거죠. 그런 위기의 순간들은 어느 팀이나 다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요.
모든 아티스트들이 자기만의 어려움들이 있을 거예요. 가장 결정적으로는 그 원활한 창작을 하기 위한 자금마련을 하는 것이죠. 물론 안정적인 경제적인 어떤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품 하나할 때 마다 굉장히 쉽지 않았는데요.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자주 모여서 연습도 하고 아이디어 회의도 하고 해서 작품을 만들고 또 특히 외국에 진출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외국에 체류하면서 작품도 만들고 현지에 계시는 분들하고 콜라보레이션도 좀 해서 하고 싶었는데, 뭐 월급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했기 때문에 각자 저마다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외국에 장기체류하면서 할 수 있는 그런 활동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뭐 무리한 목표설정이었다면 어느 정도는 인정을 하지만 그래도 뭐라 그럴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이루지 못했다는 게 아쉬움도 있지만 어느 정도 시점이 지나고 나서는 그래도 꿈을 높게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까지는 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구요. 어려웠지만 어떻든 10년을 버텨냈다는 것에 만족을 하면서 앞으로의 또 다른 10년을 버티기 위한 작전을 세웠고, 실천에 돌입을 한 상태입니다.
권보라 : 앞으로 그리시는 그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장재효 : 어느 한 단체가 시간을 오래두고 함께 하다보면 보통은 매너리즘이라고 하는데, 특성상 하나의 고정된 내지는 작품 레파토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보면 개인적인 어떤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데 대한 아쉬움 내지는 혹은 후회 같은 것이 들 수 있다고 봐요. ‘소나기 프로젝트’라는 것이 콜라보레이션을 통해서 다양한 작품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만든 단체이기 때문에 지금 함께하고 있는 아티스트 여러분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데, 지금까지는 저를 중심으로 해 왔다면 멤버 한 분 한 분마다 저마다의 독립된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정도 해서 다양한 레파토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진적으로는 한명씩이라도 차근차근 제가 월급을 줄 수 있고, 가장 핫한 4대 보험을 해결해 가는 그런 과정까지도 목표로 설정을 했어요. 그동안은 사실 포기한 부분도 있었고 했는데 중 ‧ 장기적으로는 연주자 여러분들의 음악적 성취도와 생활적 성취도도 함께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단체로 거듭나려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손범준 : 하기야 처음에는 각자 돈 내고 연습도 하고 그랬을 때니까. 처음엔 그냥 음악이 좋아서 각자 돈 각출해서 다 이렇게 시작을 하는 거죠 뭐.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서 기획도 하고 이걸 상품화 시킬 수 있는 그런 충분한 기획력도 갖고 있고 하니까 그렇지 그 당시에는 그런 게 힘들었었어요.
김형군 : 저희는 지금이 젤 힘든 거 같아요..왜냐면 약간 강박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6월에 나오는 앨범에 대하여서 과연 이 방향으로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갈 수 있을까? 진짜로 요즘 기사나 이런 것들이 나갈 때 어떻게 보면 아직 그런 단계가 아닌데 되게 성과라고 많이 얘기하거든요. 성공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사실은 ‘잠비나이’ 내부에 있는 저희가 스텝들까지 포함해서 8명인데, 이 팀원 8명은 아직 시작 안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5년 동안의 작업들은 농사라고 치면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씨앗이 나온 상황이죠. 사실은 지금부터 추수를 하기까지 굉장히 젤 고된 기간을 지금부터 향후 3~4년을 견뎌야 될 거구, 약간은 왜냐면 인제는 돌아가기도 애매한 위치거든요. 여기서는 답이 없어요. 그냥 앞으로밖에 못가요. 이게 빽이 안돼서. 일단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사실은 저희라고 공연 엄청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개런티가 엄청 비싼 것도 아니라서 아직까지.
손범준 : 그 고민은 누구나가 똑같아요. 누구나가 어느 단체나 처음에 결성해서 시작을 하면 항상 고민이 있는 거고 힘든 것도 있고 자기네들은 아직도 더 이러해서 그런 생각들을 옛날부터 다 가져 현재까지 근데 문제는 그런 고민들을 지속적으로 많이 해야 된다는 거고, 그 부분들이 맘에 맞아서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미쳤을 때 우리 선배님이 말씀하셨듯이 생활고가 확실하게 되면 미친 듯이 더욱 활발하게 할 수가 있는데.
김형군 : 사실은 재정적인 거에 있어서는 제가 제일 걱정을 해요 사실은. 이건 제 책임감의 문제니까. 왜냐면 다 번듯이 다니는 직장 다 때려치고 이거하겠다고, 이렇게 있는데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저희는 원칙이 있거든요. 똑같이 나눠요. (일동웃음)
권보라 : <슬기둥>은 그동안 어떤 변화들이 있었다고 보세요?
이준호 : 음악적으로 많이 변했죠. 틀이 바뀐다는 변화보다는 정체성 이런 부분에서 자꾸 변화를 줘야지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정서가 국악가요 스타일이고, 연주가 있고, 그러지만은 정적인 음악이 많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지금 한 50대~70대는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세대였다면, 연주 형태를 말하자면은 정과 동이 같이 어우러져야 되지 않겠나. 90년대부터는 연주곡들을 굉장히 비트가 있는 곡으로 발전을 시켜가지고, 그래서 그때 조금씩 음악이 약간 음악내용을 담아서 대중적인 그런 쪽으로 했죠. 그전에도 마찬가지지만 기악중심 음악이 되면서도 비트가 있는. 비트인데 우리 장단을 기초로 한 그런 음악들을 만들게 됐죠.
권보라 : 운영하시면서 이때가 가장 위기였다 이런 순간이 있었어요? 30년 매번 위기이셨을 것 같은데….
이준호 : (웃음) 그렇죠. 매번 위기인데, 처음에 1세대들이 하고서 물려주고 나갈 때, 그때 약간 좀 그런 이거를 이어나가야 되냐 말아야 되나 고민이 있었지만. 2000년도 거의 한 월드컵 끝나고 나서. 2005년 그때 조금 위기가 있었습니다. 운영상도 어려웠었고, 쉽지 않고…. 사실 지금이 위기입니다. 지금이 위기인데, 어떻게 한번 좀 잘 잡아보려고 애를 쓰는 거지만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어느 순간에는 악단을 없애버릴까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30년 이상 끌어온 악단에 아직 한 건 없었고, 이것을 다른 사람이 이어 나가더라도 악단이 없어지는 것은 막아야 되겠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요, 나름 이런저런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 중입니다.
권보라 : 지금 사실 후배들도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걸 유지할 수 있을까? 10년이 됐든 15년이 됐든 다들 비슷하게. 아직 이제 시작한 팀은 아닐 수 있지만. 혹시 그런 후배들에게 조언을.
이준호 : 큰 틀에서 보면 악단들은 우리음악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자산이거든요. 하지만 요즘에는 어디든지 힘들 거예요. 악단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것은 쉽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여러 가지 지원을 하는 파트들이 많이 있는데, 지원을 하는 방법이나 이런 부분들을 조금 생각 좀 많이 해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한 해 공연 지원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은, 악단의 가치성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고요, 큰 프로젝트도 한번 생각해보고요. 조금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정책적인 관심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단체들이 모여서 악단을 운영해 나가는 방법은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어려운 문제다, 하는 것이 30년 동안을 하면서 느낀 결론입니다.
‘국악생존’ 에 대하여
장재효 : 제가 <여우락 페스티벌>할 때도 그랬고 <북촌 페스티벌> 할 때도 ‘국악’이라는 타이틀을 안쓰는 이유가 있어요. 저는 아주 장기적으로는 국악이라는 말이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음악이 있거든요. 음악이고 음악 안에 여러 장르가 있는데 그중에 편의상 부르는 국악이 돼야 되는데 사람들은 국악과 음악을 분리해서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잠비나이’ 같은 팀들도 그냥 밴드거든요. 밴드고 굳이 따지면 대중음악일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이거를 국악으로 봐야 돼, 음악으로 봐야 돼, 하면 사람들은 여기서 헷갈리기 시작해요. 그건 평론가든가 기자들이 해야 될 일이죠. 사람들이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를 대중들에게 전달을 해줘야 되는 입장인데 자꾸 이들이 그러니까 니네 국악이지? 국악하는 거잖아? 이게 너무 고통스럽거든요.
저는 ‘잠비나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으니까 보지만, 기사 나오는 걸 보면, 이 사람들이 국악계 출신들로 구성된 밴드로서 어떤 가치가 있고,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지 그런 부분이 알려지고, 그래서 많이 활동할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전달해주면 좋겠는데요, 그걸 자꾸 수익적인 측면이라든가 밴드의 지속성이라든가 화제성으로만 몰아가니까 기획하는 사람입장에선 안타깝죠. 그러니까 국악음반이나 기획을 들고 언론사에 가면 “네, 두고가세요”가 되는 거예요. 결국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티스트들이 해야 되는데…. 문제는 이거죠. 제가 10년 전에 풀타임아티스트가 없다고 느꼈던 그것이 지금은 더 심해졌어요. ‘잠비나이’ 같은 멤버들만 해도 이미 30대가 넘어서 이제 곧 씨앗 뿌린다고 하고 있잖아요. 싹튼다고. 근데 사실 그거 되게 늦는 거거든요. 외국 나가면 20대 초중반에 이미 자기 세계가 완성되고 이미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게 국악계에서는 너무 늦는 거죠.
저는 ‘잠비나이’를 주목하는 이유가 뭐냐면 사명감으로부터 자유롭기 시작한 젊은 세대거든요. 본격적으로 장르를 뛰어넘어서 활동을 한 팀이고. 저 같은 경우는 민족주의를 극복하기가 너무 힘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국악이라는 틀 안에서 혼자서 감당하는 상황에 계속 오래 있었어요. 우리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20년 전부터 똑같아요. 안 바뀌고 있어요. 그게 아마 창작활동을 하고 팀별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아닐까. 아까도 말한 게 어른들이 자꾸 방해한다는 말을 한 거는 그런 이유에요.
전통음악은 딜레마가 있어요. 가장 큰 딜레마가 아카데믹한 영역과 시장에서 흘러가는 영역은 분리를 해서 가야하지 않을까. 연주를 하는 사람이근 평가를 하는 사람이든 주위에서 보는 사람이든 분리를 할 수 있는 시각을 누군가는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권보라 : <슬기둥>부터 내노라하는 선배들과 같이 하셔서 지금까지 경험하시고 계신데 예전에 처음에 했던 것과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장재효 : 전통음악 출신의 창작하시는 분들이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활동을 하시는 것 같아도 사실은 굉장히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물론 저도 저 안에도 여러 명의 장재효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목소리를 내려고 해 봤는데요. 제가 인터뷰하면서 알게 됐는데 데뷔한 지 20년이 됐네요. (웃음) 데뷔하면서부터 바로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의 어떤 변화에 대에서는 많이 아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요즘 들어서 느끼는 것은 국악계 출신들의 창작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하고 넓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뭐라고 딱 단정 지어서 말하기 뭣하지만. 저를 기준으로 40대 중반 쯤의 세대들의 어떤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와 지금의 시기를 비교를 해보면 확실히 저희 세대들이 가졌던 사명감, 전통을 보존을 하고,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뭘 하고 이런 것에서 많이 자유로워 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지만, 특히 제가 가장 기분이 좋고 앞으로 우리 한국계의 뮤지션들의 미래가 기대되는 지점들은 자신들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들에 주목하고 굉장히 깊게 파고드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타나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또 그것을 충분히 너그럽게 또 기쁘게 받아들여 주시는 우리 전통음악 애호가 여러분들 그리고 넓게는 한국의 문화를 아끼시는 그런 분들이 많아지셨다는 것이 가장 기쁘고 큰 흐름에서의 어떤 좋아졌다, 라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권보라 : ‘소나기 프로젝트’를 30년, 40년, 50년 유지하려면 환경이 바뀔 거잖아요? 혹시 미래에 원하는 환경이 있으신지요.
장재효 : 저는 뭐 단체가 오래도록 지속이 되고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건 어떤 작품을 그 시대에 발표를 하고 많은 분들과 공감을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함께 참여하고 있는 아티스트 개개인들이 과연 행복하게 연주생활 했느냐, 아티스트로서 만족할만한 삶을 살았느냐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그 만족하는 환경 중에 좋은 작품도 있을 것이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도 있을 것이고, 경제적인 안정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인데. 일단은 제가 대표로서 단원들에게 그런 고민을 하게하고 싶지는 않아요. 가능하면 저 혼자 짊어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고민을 하고. 단원 분들은 편하게 자기의 창작활동에 집중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요. 그래서 일단은 즐겁게 음악생활을 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일단은 내가 정말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은지, 아티스트로는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주 극단적으로 욕망함이 있을 때만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고, 좋은 작품이 나와야 그 다음에 이런 경제적인 안정이나 이런 건 자연히 따라온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아주 미묘한 부분인데, 아티스트들이 왜 난 이런 게 없어 불만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불만을 많이 얘기 하지만. 불만을 갖는 만큼 자기가 창작을 하기 위한 혹은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는지를 항상 자문을 하는 편이에요. 또 그렇게 자문을 하길 바라고. 물론 어렵죠. 어려운데, 그 욕망하고 자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사실은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도와주려는 뜻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계시고. 그런 면에서는 도움을 받는 거는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좋은 작품으로 얼마든지 갚을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는 그 뒤에 나타나는 아티스트 여러분들께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어려운 부분에 있다면 인정을 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음악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좀 더 집중하고 노력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고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타이틀이 내년에는 진짜 <국악전성기>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생존기는 약간 불쌍해 보여요. (웃음)
이일우 : <국악생존기>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우리가 과연 여기서 얼마나 생존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우리가 지금 생존을 하고 있었던가? 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냥 활동하던 대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남들이 봤을 때는 어떤 국악 하는 팀으로써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고, 생존을 하고 있는 걸로 보였나 봐요. 한편으로 생존자라는 생존자처럼 보였다는 게 굉장히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저희가 생존을 하고 있는지 계속 그냥 반추하게 되는 것 같아요.
권보라 : 팀 운영적인 면이나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 ‘잠비나이’ 활동하는데 어떻게 생존하고 있다? 이런 게 있을까요? 음악적으로든? 운영하는 순간에. 사전 인터뷰에서 기획하시는 분은 음악 하는 부분에 있어서 잘하시는 악기를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다. 사실 해외 진출이나 이런 걸로 나름 되게 주목받고 있으시잖아요
이일우 : 저희가 물론 국악기를 쓰지만. 저희는 국악의 카테고리의 저희 음악을 굳이 두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는 그냥 음악하는 팀이지. 그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수단이 거문고, 해금, 피리가 수단일 뿐이지 그냥 음악을 하자. 그런 생각을 처음에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보면은 많은 사람들이 국악의 대중화 하면은 국악기로 대중에게는 솔직히 다가가지 못하는 음악을 ‘이지리스닝’ 의 음악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그냥 이 사람들이 그냥 좋아할 음악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뭔가 이지리스닝을 하기보다 대중성을 고려했다기보다 그냥 저희가 악기로 좋은 음악을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게 생존에 뭔가 큰 요소였던 것 같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활동을 할 것 같아요. 과연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뒀을 것 같아요. 어떤 음악을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가, 어떻게 하면 국악이 대중화가 될 것인가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계속 좋은 음악을 만들까 이 생각을 앞으로도 계속 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보미 : 우선 저희 팀 안에서는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저희가 단합도 잘 되고 생각도 비슷하고. 잘 맞는 것 같은데. 개인적인 문젠데…. 글쎄요, 고민이라면 정말 말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고. 개인적으로 음악적으로 어떻게 내가 성숙한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계속 꾸준히 해야 될 것 같고. 체력도 잘 관리를 해야 되겠다.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고민은 되게 행복한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권보라 : 혹시 ‘잠비나이’의 꿈 같은 거 얘기해보신본 적 있으세요?
김보미 : 흰머리가 날때까지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나이 들어서도 되게 진지한 모습으로 음악을 하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