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 5호   山:門 AROUND

충무로에서 힙지로까지의 산책

이야요_예술인
발행일2021.03.09

최근 핫하게 떠오른 ‘힙지로’를 더욱 힙지로답게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한 건 아마도 예술가들이 아닐까. 을지로만의 매력에 이끌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예술 작업을 이어나가는 예술가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은 왜 그곳에 공간을 열게 된 것일까. 또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지역에 안착하며 활동하고 있는 걸까. 충무로에서 을지로로 연결되는, 예술인 이야요의 산책길을 함께 따라가 보자.

힙지로에 둥지를 튼 그들을 찾아서

한옥마을에서 출발하여 을지로 3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밀집된 식당가와 카페, 이미 예술 거리로 예쁘게 가꿔진 거리를 지나 길을 걷다 보면 차츰 을지로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각양의 모양으로 늘어선 조명가게, 아크릴 가게, 인쇄소, 바닥 자재 가게 등등으로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을지로 본연의 길이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한다. 대체 ‘힙지로’라고 불리는 장소들이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이 거리는 내가 학창 시절에, 살 물건도 없으면서 마냥 신기하고 보기 좋아 구경하길 좋아하던 곳이고, 미대 입시 때는 그림 그릴 종이를 대량으로 구입해갔던 그 가게 그대로인데, 과연 이곳에 ‘힙’한 감성의 힙지로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 길이 없어 우선 대학교 동기가 운영하는 ‘육일봉’으로 좌표를 잡아본다. 그녀와 대화를 하며 이 육일봉을 시작점으로 ‘작은물’, ‘을지공간’, ‘중간지점’에 점을 찍고 힙지로 산책을 나서봤다.

육일봉, 초신진 작가들의 신선한 감각으로 가득

바(bar)이자 전시 복합공간 육일봉 ⓒ 이야요

작업실을 구하려던 차에 이전 동업자(지금은 동업자 춘리와 2인으로 운영한다)의 짧은 제안, “을지로에 한번 와볼래?”라는 한 마디에 지금의 공간에 날아들었다. 박가인 작가는 당시, 낡았지만 구색이 갖춰진 이 공간이 너무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덜컥, 부모님이 결혼자금으로 건네주신 4,000만원을 투자했다고 한다.(결혼을 할 것 같지 않아서 마음대로 해보라고 받은 자금이란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 운영 방식을 ‘무계획’이라고 표현했다. 나중에 다른 공간을 운영하는 대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들 몇 개월 정도의 월세는 마련해두고 공간의 운영 방향을 계획하고 시작하는데, 자신은 그런 ‘계획’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운영 초기 월세는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해서 누를 끼쳤고, 공간을 운영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공간을 일단 점령하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육일봉의 내부 공간 ⓒ 이야요
당시에는 ‘전시’라는 형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자신의 전시를 위해 애쓰지는 않더라도, 지원금조차 받기 힘든 ‘초신진’ 작가들이 전시를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공간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부터 육일봉의 정체성과 공간 운영 방식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가인 작가는 허허실실 웃으며 말한다. “거기서부터 잘못됐다랄까?”
초신진 작가들의 감각이 살아 있는 육일봉 내부 ⓒ 이야요

현재 부스가 있는 바(bar)이면서 전시 복합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육일봉의 전시 및 공연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평균 월수입 100만원이라는 육일봉의 임대료는 110만원이라고 했다. 박가인 작가는 또 허허실실 웃으며, “기본적인 생활만 하면 되지 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곧 있을 미술관과의 공연 작업으로 분주했고, 그럼에도 육일봉의 감성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음식을 나눠먹고 있었다.

인스타그램: @youkillbong (운영진: 박가인, 춘리 작가)
주소: 서울 중구 을지로16길 20 6층

작은물의 ‘밥’ 나누어먹는 이야기

한 층은 카페로, 그 위층은 작업실 겸 공연장으로 운영하는 공간인 작은물의 운영진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계기는, 공간 운영 이전에 을지로 일대를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임대료가 크게 작용을 했다고 한다. 특히 ‘동네가 주는 좋은 느낌’을 언급한다.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골목마다 오래된 장소가 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임대료와 좋은 느낌 외에 그들의 시작은 너무 소박해서 소중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바로 ‘밥’이다. 함께 자주 모이던 다섯 명은 공간 운영 초기의 멤버들이다. 이들은 6,7년 전쯤부터 이곳 어딘가의 다른 공간에 가서 모임을 갖는다거나, 공간을 빌려서 밥을 먹는다거나 하는 활동을 함께했다. 그러나 차츰 다른 공간에서의 모임이 불편해졌고 “그럼 작업실 겸 우리가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공간을 한 번 구해보자”는 데서 시작됐다.

한 층은 카페로, 다른 한 층은 작업실이자 공연장으로 운영되는 작은물 ⓒ 이야요

“밥 먹는 것이 저희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였어요. 조금 부끄럽긴 한데 좋은 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그 밥을 먹은 몸을 생각하는 게, 도시에서 예술을 하며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됐어요. 그래서 밥을 해 먹기 시작했어요. 그 밥을 먹는 자리는 사람이 밥이 될 수 있고 사람이 반찬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밥은, 저기 보면 가마솥이 있는데, 가마솥에 한살림 칠곡쌀로 밥을 지어 된장 비빔밥을 해서 같이 먹었어요, 그렇게 저희끼리 먹다가 주변 친구들을 하나둘 초대해서 밥을 먹어보자 해서 초대를 했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음악 하는 사람도 있고, 밥상에서 작은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그림 이야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공연까지 열리게 된 것 같아요.” 

작은물의 내부 공간 ⓒ 이야요

지금 4년째 운영 중인데, 2년 지나서 건물주와 갈등이 한 차례 있었다고 한다. 그때가 위기라면 위기였다고 할까. “그때는 당황해서 임대차 보호법을 보여주며 내용증명을 먼저 보냈죠. 그렇게 대응을 하니 건물주는 더 화가 나서 발끈하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서 내용증명을 보낸 거였는데... 그때쯤에 여기 모이던 예술가들이 같이 싸워주겠다고 하기도 했는데, 싸우는 건 원하지 않아서 당시를 기점으로 음악가들이 모여서 음반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고민하던 차에 다른 방법으로, 편지를 정성스럽게 써서 보냈어요. 이후 건물주의 마음이 누그러져서 직접 찾아와 대화도 나누고 공간도 둘러보니 ‘이 친구들이 돈 생길 구석이 없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 거죠. 그래서 임대료를 조금만 인상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계속 운영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zak_eun_mul (운영진: 윤상 외 1인)
주소: 서울 중구 을지로16길 6 3층

을지공간, 을지로에 더해진 소극장의 매력

소극장 위 와인바가 자리한 을지공간 ⓒ 이야요

“‘신도시’는 제가(장정인 상임연출) 을지로를 처음 발견한 계기에요. 맥주를 마시러 갔는데 이런 공간이라면 운영을 해도 재미있겠다 생각했죠.” 오래전부터 소극장을 운영하고 싶었던 장정인 상임연출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공간을 탐색했다. 처음에는 대학로 일대의 공연장 인수를 생각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었고, 그런 비용이라면 차라리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굳이 대학로일 필요는 없었다. 또한 을지로 일대에서 작업을 구상하다 보니 계속 이곳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공간을 만들면서 이곳은 제게 참 재미있는 곳이었어요. 196,70년대의 모습이 계속 유지되는 곳이면서도 가장 많이 변하는 곳이라고 생각되는 역설적인 곳이 여기예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서 일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며 궁금해 하는 그런 모습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뭔가가 구색을 갖추지 않고, 무언가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활성화된 지역마다 특색이나 규격화된 어떤 문화나 행동 방식이 있는데 을지로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을지공간의 분장실(위)과 무대(아래) ⓒ 이야요

을지공간은 공연장과 함께 바로 위층에 와인바(온더무브)를 운영하고 있다. 조명 워크숍, 희곡 쓰기 워크숍 등 또한 계획 중이다. 지원기금으로 간혹 공간 운영을 충당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쉽지 않다고 했다. “2021년에는 함께 할 수 있는 구성원들이 좀 더 갖춰져서 지속적으로 각자의 생계와 공간 운영을 이어갈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바람이에요. 위층에 바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 외에 지속 가능한 뭔가를 찾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euljispace (삼임연출: 장정인, 대표·단원·배우:김태형, 기술PD·기획·단원: 전정현)
주소: 서울 중구 창경궁로5길 5 4층

중간지점, 이야기가 모여드는 전시 공간

“을지로는 원래 계셨던 분들이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이 많이 생기기도 하지만, 제가(이은지 작가) 을지로를 선택한 이유는 임대료 문제도 있고, 현장에 들어갈 당시에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세운상가의 작가들만의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당시 ‘신도시’ 공간도 더욱 활발했던 것 같고요. 그만큼 을지로에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갈 때라서 을지로로 오게 됐습니다. 처음엔 제 작업실이었던 이곳이 중간지대로 자리를 잡은 건 2018년 3월 ‘짐과 요동’이라는 2인전에서 출발했습니다”  

이은지, 박소현 작가의 ‘짐과 요동’ 전(위, 아래) ⓒ 중간지점
‘짐과 요동’ 전은 이은지 작가와 박소현 작가의 작업물을 보관하던 형태에서부터 출발한다. 작업물 보관의 형태와 부피의 축소 또는 변형의 방식으로서 작업물의 또 다른 과정에 대한 관찰이었다. “그 전시를 만들어나가면서 느꼈던 건 어떻게 보면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이 참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간지점’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작용할 수 있죠. 예를 들면, 물리적 거리로 인한 중간 지점이나 예술 종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이 사무실의 위치처럼 끼어있는 어떤 상태에 있는 중간지점이지만 모여들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중간지점은 건물의 703호로, 공간 속 작은 공간이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작업의 과정 중에서 하나의 지점들을 찾아가면서 좀 더 실험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그것을 발돋움 삼아서 또 다른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 접근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2인전을 하면서 김옥정, 김기정 작가도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된 거예요. 그래서 ‘중간지점’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드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중간지점에서 작업을 이어나가는 작가들 ⓒ 이야요

현재는 2인씩 짝을 지어 ‘중간지점’ 부근에 작업실을 두고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월세 부담은 각자 제3의 일로 충당하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다행히 ‘중간지점’은 예술공간 지원금을 받아 운영 중이다. 최근의 가장 중요한 일은 단행본 <중간중간>을 발행하는 일이다. “하나의 개인이 공동화되기까지의 과정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목차는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여럿으로 이어지고 그 세부 목차는 그 구성에 맞게 전시들이 목차로 들어감으로써 중간지점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단행본을 제작하고 무료 배포할 예정이며 해마다 단행본을 발간해볼 생각이에요.”

인스타그램: @jungganjijeom (운영진: 이은지, 박소현, 김옥정, 김기정 작가) 
주소: 서울 중구 을지로14길 15 장양빌딩 703호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대화 내내 자주 등장했던 ‘신도시’라는 공간은 힙지로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다. 인터뷰 섭외 당시 코로나의 영향으로 인스타그램에 1월 말이 이후로 새로운 소식이 올라오지 않았고, 공간 운영도 임시 휴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신도시’는 그야말로 을지로의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그런 곳,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곳으로 건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육일봉 운영진으로부터 ‘참새가 방앗간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슬쩍 전해 들었다. “을지로 행사는 보통 금, 토요일 위주로 돌아가죠. 신도시, 감각의 제국, 작은물, 육일봉 등의 파티 라인업이 올라오면 취향과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대거 이동해요. 어떤 때는 작은물 공연 이후 2차로 육일봉을 방문하기도 하더라고요.” 외부에서는 알 길 없는 그들만의 소식지(인스타그램)로 그날의 밤을 향유하고, 그날의 예술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힙지로 향유 지대의 일부 ⓒ 이야요

그 향유 지대를 돌며 질문을 건넨 네 개의 공간은 그들만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동시에 나는 그들과 같은 입장의 한 예술인으로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동안 다양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글을 핑계 삼아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유하다 보니 어떤 느슨한 공동체로 연결된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중간중간 공간 중개 사이트에 들어가 을지로 주변의 빈 공간이 있는지 나도 모르게 살펴본다. ‘힙지로’라고 불리기 훨씬 이전에, 또 그 이전에도 예술가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예술가들의 방앗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돌아가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취향을 찾아다니는 요즘의 세대 덕분에 이곳이 ‘힙지로’라 이름 붙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예술의 향유를 환영한다. ‘너’와 ‘나’의 느슨한 공유를 반겨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발자국을 따라 함께 묻어 들어오는 ‘자본 욕구’를 고민해보게 한다.

글을 마치며 나는, 을지공간의 장정인 상임연출의 말대로 “뭔가가 구색을 갖추지 않고, 무언가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규격화된 행동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이곳이 계속 남아주기를 바라본다.

이야요_예술인
흰 구름과 먹구름 사이에 있는 사람. 흰 구름은 ‘날씨가 어떠하다’라고 정의 내리지만 먹구름은 ‘날씨가 어떠할 수도 있겠다’라고 예상해봅니다. 그렇다면 아직 정의 내릴 수 없는 먹구름이 좀 더 매력적일지 모릅니다. 나는 그 구름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시로 순간을 기록하고, 퍼포먼스로 예술을 즐기는 일을 합니다. 이야요는 재미있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재미있는 일이라면 변화무쌍하게 얼굴을 바꾸며 등장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