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하나의 산조에 매진하며 소리를 갈고 닦아온 명인들의 성음을 듣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젊은 연주자들이 자신의 고민을 안고 소리를 만들어가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일례로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연주한 원나경(3월 10일)은 귀를 자극하여 어필하는 ‘콩쿠르식 연주’를 의도적으로 벗어나려고 한 것 같았는데, 어찌 보면 심심하고 투박하다고 볼 수도 있는 연주를 통해 해금의 소리에 대한 유행을 탈피하고 산조 본연의 이야기(마치 친구에게 내밀한 속내를 조근조근 얘기하는 듯한)에 집중하고 있음을, 연주자가 산조를 탐구하면서 가지게 된 현재의 고민을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후에 그가 산조를 만든다면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의 기술과 표현을 넘어 기존의 유산에 대한 깊은 고민과 본질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폭발의 수혜를 가장 빨리, 가장 많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부러웠다.
팽창하는 우주, 팽창하는 산조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우주는 작은 점에서 시작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팽창중이란다. 수십억 년이 지나면서 팽창 속도는 느려졌지만, 어느 부분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산조를 바탕으로 한 창작 작업들도 양적인 팽창을 이루어 왔다. 산조는 본래 연주자가 창작하는 음악인데, 이처럼 산조를 익힌 연주자가 자신의 산조를 만드는 작업도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악기로 연주하는 산조는 물론 선율악기가 아닌 타악기로 연주하는 산조 등 악기와 형식도 확장 중이다. 작곡가들도 산조의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 활용한다. ‘산조’(散調)의 말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자유분방하게 진행되는 창작곡에 ‘산조’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산조는 악기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와 최적의 기교를 포함하기에, 고난도의 기교를 적극 사용한 작품에 ‘산조’를 부제로 단 작곡가도 있다. 나는 산조가 필요 이상의 ‘권위’를 갖는 모습에 대한 비판으로써 재즈가수 말로와 즉흥적인 구음과 블루스 음계를 산조의 틀에 접목한 <말로제 김준영류 거문고 반조>를 선보인 적이 있다. 김용성은 <流(류)-심연의 아이> 공연을 통해 자신의 전공인 아쟁을 비롯하여 여러 악기를 자신이 직접 지은 ‘산조’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김창조의 틀에 대항하는(대비되는) 산조’로 느꼈다.
이렇게 산조는 그것이 지닌 이야기성, 대중성, 파격성, 즉흥성, 형식미, 포용성 등의 성격, 평조‧계면조‧우조의 음계와 그외 여러 음악에서 나타나는 음 재료들, 장단의 틀과 이를 비껴가는 리듬적 변칙의 묘미, 오랜 연마 끝에 얻게되는 테크닉과 음색의 자연스러움 등 무수한 요소들이 제각기 또는 함께 커져 왔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팽창중이다. 이러한 운동 속에서 산조는 스스로 계속해서 커갈 것이다. 다만 연주자는 ‘산조라는 우주 안에서 나는 어떤 크기의 별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할 따름. 수많은 성간물질들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얼마나 넓은 포용력으로 그것들을 내 안에 담고, 얼마나 강한 응집력으로 그것들을 압축해 낼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끈질긴 에너지로 그것을 소진하고 폭발할 것인가 등등.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이에게 산조는 모두 거기서 거기처럼 들릴 것이다(심지어 어떤 산조 연주자들에게도). 산조라는 음악이 정-반-합의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존재하던 것들의 응집-확장-포용-변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우주의 성간먼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이해한다면 바로 지금, 이토록 변화무쌍한 ‘산조의 우주’를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 어찌 즐겁고 경이롭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